나무아미타불이 곧 실상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실상을 본체로 한다實相爲體”는 것은 대부분 이치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푸르른 대나무가 모두 법신이요, 아름다운 국화도 반야가 아닌 게 없어라”, 이런 것은 모두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치상의 실상은 불보살님들의 경계에서 보면 본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생멸이 있는 범부들에게는 여전이 두 쪽으로 나눠져 있어서 이치상으로는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생멸의 경계 속에 머물러 있기에 우리는 그 속에 무슨 반야나 법신이 있다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우리는 여전히 생사윤회 속에 있습니다.
이른바 “생사가 곧 열반이요, 번뇌가 곧 보리로다”는 것도 이치상으로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미타여래께서 명호를 본체로 삼는다는 것은 이치상의 실상을 하나의 사실로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부를 수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만 부를 줄 알면 염불하는 순간이 곧 실상입니다. 무엇을 불가사의라고 말할까요? 이것을 불가사의라고 말합니다. 이른바 “남모르게 부처님의 지혜에 통하고, 은밀하게 중도의 묘한 이치에 계합한다”는 것이지요.
비유를 들겠습니다. 우리가 세간 법을 빌려서 말하더라도 이치가 이렇습니다. 예컨대 핸드폰의 경우, 핸드폰은 무선전파의 전송원리에 의지하는데, 이게 바로 이치상의 실상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를 일반 노보살님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사 전문가 본인은 알고 있어도 남들이 다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남들에게 말하겠습니까? “불가설, 불가설입니다. 당신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이 전송 장비와 수신 장비, 핸드폰 등등을 만들어 놓으면 노보살님들이 이 핸드폰을 손에 들고 아들과 통화할 수가 있습니다. 노보살님이 무선 전송의 원리를 아십니까? 통신신호를 어떻게 전환하는지 아십니까? 그분들은 일절 모릅니다. 그럼 알 필요가 있을까요? 알 필요가 없습니다. 노보살님이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핸드폰이 쓸모가 없습니까? 똑같이 쓸모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실상을 모르고 우리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 우리가 염불을 하면 무명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명호를 본체로 삼는 것입니다. 명호 자체에 이런 효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명호는 하나의 사실이 된 실상입니다.
우리의 이 사바세계에서 어느 것이 실상입니까? 모두 허망상虛妄相입니다. “무릇 모든 상은 전부 다 허망하다”, 우리가 들은 이 나무아미타불 명호 말고는 어느 것도 실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거기서 헛수고를 하지 마세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려면 우리 범부의 근기로써 할 수 있는 것을 닦아야 합니다. 이렇게 가장 귀중하고 구경원만한 실상을 한쪽에다 버리고서 혼자서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하느니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지만 당신이 아무리 관해도 전부 다 본인의 허망한 상상에 불과합니다. 관을 하면서 ‘아주 잘 상응하고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모두 당신의 의식분별의 그림자가 이것을 실상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은, 이른바 “대승의 진여실상, 제일의공”이라는 것은 매우 미묘한 것이지만 우리는 마음에 두지 못하고 일으키는 생각마다 잘못되었습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성취하신 진여실상법이 바로 이 명호여서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고, 게다가 이 실상은 보살들이 증득한 일부분의 실상이 아닌 원만한 실상입니다.
실상은 황금과도 같습니다. 우리 이시대의 황금을 부처님 시대의 황금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금빛이 나타나지 않고 빛이 없습니다. 부처님 시대 황금의 빛에 가려진 것이지요. 그럼 지상의 황금을 가지고 천상의 황금과 비교하면 빛이 나타나지 않고 가려져 버리게 됩니다. 그럼 천상의 황금을 가지고 극락세계의 황금과 비교한다면 역시 빛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신 스스로가 느끼고 깨달은 ‘실상’은 보살들이 증득한 실상과 비교하면 당신의 광명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초지보살이 2지보살이 증득한 경계와 비교하면 광명이 없습니다. 십지보살이 부처님과 비교하면 또 광명이 없습니다.
그럼 시방제불이 증득한 실상은 당연히 원만하고 완전한 것이지만 육자명호와 비교하면 빛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우리 범부들로 하여금 원만한 실상의 이익을 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귀중한, 염부단금보다 더 염부단금다운 절묘하고 존귀한 실상을 우리 모두가 얕보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것을 칭념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거기서 ‘내가 어떻게 하면 실상을 깨달을 수 있을까?’하고 상상하고 있다면, 어디 가서 실상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수없이 깨달으려 해도 깨닫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한 구절 부처님 명호였구나!”, 정말로 이렇습니다.
이치상의 실상에서 사실의 실상이 된 것은 불가사의합니다. 담란대사님은 이것을 “실상신實相身, 위물신爲物身”이라 말씀하셨지요.
실상신이란 이 육자명호 자체가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정각의 실상이요, 원만한 지혜요, 진리 그 차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위물신으로서 우리 중생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부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형상이 있는 한 구절 명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모두 분별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형상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사물들은 전부 다 허망한 법입니다. 오직 이 명호만이 실상법입니다. 이런 실상의 명호를 우리가 부를 수 있고 얻을 수 있으므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명호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돈초頓超·횡초橫超·직접直捷적인 법이어서 어떤 법문도 이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여기서 허풍을 떠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이 법문을 배우기 때문에 당신은 이 법문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고, 나는 선을 배우기 때문에 당연히 선이 좋다고 말한다” 당연히 다 좋습니다. 어느 법문도 안 좋은 게 없습니다. 하지만 비교를 해본다면 인지의 실상과 과지의 실상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실상 자체에는 원인과 결과를 말할 수 없긴 하나, 다만 중생이 원인을 닦아 과위를 증득하는 측면에서 말하면 여전히 하나의 시작점이 있고 나중에 하나의 결과를 증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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