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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jade 2018. 9. 3. 16:48

 

 

            해인사 안락스님

 

해인사 안락스님은 1930년대 스님으로

오로지 정토왕생에 뜻을 두고

방안에는 선반위에 오직 정토 삼부경만 올려두고

주로 방안을 돌면서 염불을 많이 하셨는데

잠이 오면 방모퉁이에 기대고 앉아 잠시 쉬었다가

 염불을 하신 분이었다.

또 평소 생활은 항상 검소하게 하시고

신발은 떨어져서 늘 기워 신으시면서도

새 신이 생기면 스님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두고

아무나 필요한 사람이 신게 하셨다.

만년에는 고성 문수암에서 열심히 염불 하시다가

그곳 바위 아래 앉아서 입적하셨다고 한다.

 

        수도암 진허스님

박진허스님은 서방정토 왕생에 뜻을 두고

수도암에서 염불선을 수행 하였다.

임종시에 등각스님이 시봉을 하였는데

"내가 앉아서도 갈 수 있는데" 하면서

눕더니 입적 하셨다.

임종을 지켜본 이들의 말이 "조사 열반이라 하더니

이런 줄을 처음 보았다"

하였다.

 

       언양 석남사 동인암 송덕스님

동인암에 계셨던 비구니 송덕스님은 고모이신 법순스님을 은사로 7세에 동인암에 출가했다.

평소에 늘 율무로 만든 천주를 돌리며 염불을 하셨으며 자비심이 많으셔서 인근 마을에 가난한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꼭 밤에 몰래 쌀 한말과 된장 간장을 가져다 뒀다고 한다.

또 산에 나물 뜯으러 온 아낙이 있으면 꼭 불러서 밥을 주었다고 하며. 나이가 들어서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새벽예불 때는 꼭 일어나 앉아서 아미타경을 외우시고 염불을 하셨다고 한다. 1965년 음력 2월에 81세로 입적 하셨는데 입적 바로후에 가지산 꼭데기에서 광명 무지개가 비쳐서 동인암 앞뜰 수각에 와 꼽혔다고 하며. 또 스님의 시신을 가리운 병풍뒤에서는 환한 광명이 오랫동안 비쳤다고 한다.

스님의 다비장에서 오색사리 3과가 나왔는데 다비후 100제를 지내는 동안 사리가 나온줄 몰랐다가 인근에 일하던 농부들이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어두우면 다비장에서 광명이 비쳐서 길을 밝혔는데 농부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가서 뒤져보니 사리 3과가 나왔는데

콩알보다 큰것과 콩알만한것등이었는데 모두 진주알같이 영롱하고 광명이 잇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989년경에 송덕스님의 손상좌이신 보덕사(언양에서 석남사 가기전 오른쪽)

 

주지로 계시던 자행스님께 직접들었으며 송덕스님 입적하신 후에는 지금의 보덕사에 자리잡게 되어 그때 사리탑도 옮겨오게 되었는데 보덕사안에 모셔져 있다.

그때까지도 법당에는 사리 사진이 있었으며 또 송덕스님께서 쓰시던 달고달은 율무 염주도 있었다.

 

                  해인사 혜붕스님

혜붕스님은 해인사에서 논강論講을 잘하는 강사로 지내다가 정토에 뜻을 두고 성주 신석사에서 왕생업을 닦고 있었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대원사로 옮겨 염불수행을 더욱 열심히 하였다.

그러던중 입적하기 하루 전날 평상시처럼 죽을 먹으면서 그절 주지스님에게 "나는 내일 간다" 하시길래

그 주지 스님이 당일 저녁 10시가 되도록 곁에서 시봉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주지스님이  잠자리에 들겠다고 하고 "만약 가실 때는 저를 부르던지, 벽을 세번 두들기세요." 하고 혜붕스님 곁에서 물러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새벽녘에 공양을 짓는 施主가 잠결에 들으니 벽을 세번 두드리기에 혜붕스님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혜붕스님이 손으로  원圓을 그려 보이면서 조금 있다가 눈을 감고 입적 하였다고 하였다.  

다비를 하니 사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1988년경의 일이다.

         경남 고성 옥천사 청련암 서봉스님

서봉스님은 60여세부터 청련암에 주석하면 이제까지 지계수양을 돈독케 하지 못한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참회 발심하여 정토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무아미타불 육자염불을 밤낮 쉬지않고

정진하여 오던 중 만년에는 기동을 못하여 분뇨를 방에서 하시니 동거하는 스님들이 싫어하여 잘 돌보지 않았다.

그러던중 1879년 10월 어느날 새벽에 동암에 거숙한 부존스님과 감원스님의 꿈에 서쪽에서 불 보살님들이 꽃가마를 가지고 와서 서봉스님을 모셔가는 꿈을 똑 같이 꾸고 그날 아침에 스님의 방문을 열어보니 스님은 좌탈 입적하셨고 방에는 평소 나던 악취는 간데없고 기이한 향기와 풍악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또 다비한 그날 저녁에는 청련암을 위시하여 연화산 내에는 방광현상이 나타나서 옥천사내 대중들이 환희하였다고 한다. 현재 주차장 입구 좌측 암벽에 서봉스님 방광비가 새겨져 있다.
1990년경에 옥천사 주지스님께 직접들은 이야기입니다.


좌탈입망(坐脫立亡), 염불 왕생한 정보살

충남 연기군 서면 봉암리에 정보살이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36년전 월현사에 찾아와서 스님께 하는 말이
"나는 자손도 없이 늙은 영감하고 사는데 영감도 오래 못 살 것 같고, 내가 만약 늙고 병들어 오래 고생한다면 물한모금 떠 넣어줄 사람도 없는데 누가 병간호를 하며, 제일 큰 일은 죽음인데 어떻게 해야 죽을 때 남의 신세지지 않고 고생않고 자는 듯이 가야 할텐데, 그러한 방법은 없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월현사 스님은 부처님 말씀에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하시며, "아미타경에 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무아미타불 열번만 불러도 생사를 해탈하고 왕생극락을 한다고 하였으니,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서쪽을 향하고 합장하고 서서 나무아미타불을 열번 부르고 자신의 왕생극락을 축원하며, 이렇게 죽는 날까지 일생동안 염불한다면 임종시에 고생하지 않으며 아미타부처님이 연화대로 모셔간다’고 일러 드렸다.
정보살님은 36년간을 염불을 하며 근래에는 법회도 열심히 잘 나오시고, 식사도 잘하고, 건강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90세 되던 1994년 12월 24일 오전 12시경, 이웃집 사람이 부엌에 앉아있는[좌탈입망(坐脫立亡)] 모습이 이상하여 가서 불러보니 대답이 없기에 만져보니 수족이 차고 정신이 없었다. 구급차를 불러와 진찰을 하였다. 진찰한 의사는 ‘약 한시간 전에 심장이 멈추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죽기를 원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 공덕으로 누구에게도 괴로움을 끼치지 않고, 한시간 만에 이 세상을 고통없이 떠난 것이었다. 월현사 신도들과 함께 장례도 잘 모셔드리고, 칠재와 49재를 성대히 잘 지내드렸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염불공덕이며 부처님의 원력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무슨 소원이든

원을 세우고, 지성으로 노력만 한다면 백발백중 다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공은 들이지 않고 공짜로 바라기만 하니 소원이 성취 안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사람들은 이승살이는 연구하고 노력하면서도 저승살이는 소홀히 한다. 저승살이는 선사공덕을 많이 행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염불한다면, 세세생생 좋은 국토에 태어나 좋은 인연을 만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행하여 마침내 자성미타를 성취하게 된다.
‘나무아미타불’을 열번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 극락에 왕생하며, 아미타경 한번 읽은 공덕으로 멀거나 가까운

일가 친척들이 극락왕생하고, 아미타 경을 수지 독송한다면 8만 4천 지옥문이 부서지고, 8만 4천 자비광명을 얻어 3계 4생 6도 중생이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다.
유형태로 제일 큰 것은 바다요, 무형태로 제일 큰 것은 허공이며, 공덕중에 제일 큰 공덕은 아미타경을 수지독송함이라. 나무아미타불을 일생동안 염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큰 공덕은 없을 것이다.

 

 

       아미타불 염불하시고 웃으시며 돌아가시다

 

현재 봉화 축서사 조실로 계시는 무애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장마철에 해인사에 계시던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상하러 갔는데 돌아가신 스님의 상좌가 하는

말이 평생 아미타불 염불을 하셨는데 돌아가실 때 웃으시면 가셨는데 하루쯤 지나 보니 그대로 육신이 청정하더랍니다. 장마철은 습도가 많고 또 여름철이라 시신이 잘 부패하는데도 며칠이 지나서 다시 봐도 그 모습 그대로 깨끗하고 웃으시는 모습 그대로랍니다.
평생 나무아미타불을 염하셨으니 돌아가실 때 부처님께서 마중나오셨으니 웃으면서 극락정토 왕생하셨을 거라고 무애스님께서 말하셨습니다.

                        좌탈입망

 

제작년 봉암사에서 있었던 한 스님의 입적 이야기 입니다.

스님의 법명은 "우선" 청화크스님의 상좌로 출가하여 11년 되던  제작년에 봉암사 산내 토굴인 용추라는 곳에서

홀로 좌탈입망을 하셨습니다.

스님은 평소 토굴에서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염불 수행을 하셨는데,

관정큰스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던 2001년에는 강원도쪽에서 법회를 할 때 직접 크스님을 자신의 차로 모시고 싶다고 찾아와서 큰스님께 마정수기를 받고 큰스님의 법회 장소까지 직접 모셔다 드린 인연복을 지은 적도 있었는데,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오로지 토굴에서만 수행을 하시다가 입적하기 2년전에는 대중생활을 해 보고자

문경 봉암사 선원에 들어와 대중들과 함께 정진을 하면서 은근히 염불수행을 권장하자 대중스님들이 모두 싫어하면서 그딴 소리 하려거든 토굴로 가던지 스님 은사스님 회상에 가라고 핀잔을 주는 소리에 무척 마음 상해하셨는데,

결국 다시 봉암사에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용추라는 토굴로 수행처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시대의 최고 수행자라고 할 수 있는 청화 큰스님께서 입적하시던 날,

봉암사 큰절에서는 청화큰스님의 상좌인 우선스님에게 스님의 은사이신 청화큰스님의 입적 소식을 알리기 위해

행자를 시켜 용추 토굴에 보내었는데,행자가 용추 토굴에 가서 보니 스님이 앉아 계시는데 고개를 약간 수그린채로 앉아서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그냥  앉아만 계시니까 큰 절로 되돌아 와서 하는 말이

"스님이 어디가 아프신것 같습니다.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계속 앉아만 계시는데, 고개를 수그리고 계시더라고..." 하여 대중 몇 스님이 다시 용추 토굴에 가서 방안에 들어가 보니 앉은채로 입적을 하신지가  이미 며칠이 되었다고 합니다.물론 좌탈입망이 공부를 증명하는 대단한 경계는 아니라고 할 지라도 참선하는 스님들은 물론이요,

이름 난 큰스님들 까지도 입적하는 경계상에서 여여한 모습으로 좌탈입망을 하려고 부득불 애를 쓰시며,

조금 심한 경우에는 이미 죽은 큰스님의 뼈를 부러뜨려서라도 억지로 앉혀 논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인데,

우선스님의 경우에는 오로지 염불 수행만으로 좌탈입망하는 경계를 보여 주었으니,

역시 불보살님의 가피력이 얼마나 수승한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된 것 같습니다.

 

           염불왕생하신 외할머니 이야기

나의 외할머니는 지식인으로 대학교수이다. 일생 동안 선을 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상냥하고 친절하였다. 처음엔 그 분도 불교를 미신으로 여겼다. 그러나 내 일로 인하여 불교는 미신이 아니며 인과가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역자주 : 이 이야기 또한 전편의 ‘개구리를 즐겨 먹은 과보’의 주인공이 쓴 글이다>
외할머니는 평생 동안 건강하고 병과 재난이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신체 곳곳에서 불편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것은 정상적인 노쇠현상이며 큰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몸의 수명이 다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애를 태웠다.
그 후에 양 여사가 여러 차례 가르침을 주면서 “모든 인연을 놓아버려야 하며, 몸에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경서를 읽을 필요 없이 단지 일심으로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대자대비하신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받아 우주인생의 진리를 깨우쳐 모든 고통에서 진정으로 해탈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모든 인연을 놓고 염불하기 시작하였다. 본래는 완전한 채식을 하려고 하였으나 자녀들이 연세가 많아 영양이 부족해진다며 고기를 조금 먹기를 권하였다. 그래서 완전한 채식은 하지 못하였다.
팔십삼 세 되는 그 해 어느 날 위가 불편하여 무엇을 먹으면 다 토하였다. 나중에 토한 것은 간장 색의 액체였다. 먹는 것도 많지 않았으며, 게다가 언제나 토하니 정신이 맑을 때가 며칠 없었다. 횡설수설하며 혼미하였다. 입원하여 검사해보니 의사는 노인이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으니, 치료를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X레이 사진상 소뇌가 매우 위축되어 치매로 변한 것이라 하였다.
우리 온 가족은 모두 의사에게 백분의 일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최선의 노력을 다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수액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효심을 다하여 외할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갑자기 의사가 치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생각나 어찌 염불을 안 하고 외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도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화를 걸어 양 여사에게 가르침을 구하였다.
그는 내게 성심으로 외할머니를 위하여 『지장보살본원경』을 염송할 것을 일러 주었다. 만약 수명이 다 되었으면 조만간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고통을 면할 것이며, 수명이 다하지 않았으면 조만간 회복하여 수행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매일 성심성의껏 외할머니를 위하여 독경하였다. 경을 세 번째 독경할 때 외할머니가 깨어났다고 하였다. 정신도 매우 맑았으며 먹을 것을 요구하였다. 채식을 하였으며 고기는 들지 않았다. 외삼촌은 먼저 외할머니의 뜻에 따라 원하는 것을 주었다. 나는 독경의 불가사의함을 느끼고 더욱 경건하게 『지장경』을 일곱 번 염송하였다.
할머니는 이때부터 몸이 하루하루 좋아졌다. 어떠한 치매 증상도 없을 뿐 아니라 음성도 또랑또랑하였으며 기력도 충분하였다. 노인이 저승문에 들어갔다가 이렇게 좋은 상태로 회복되니 의사도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의사는 병을 치료할 때 치료과정을 이야기하고 외할머니는 치료하는 시간에 한편으로 같은 병실의 환자에게 염불할 것을 권하였다. 그들이 볼 때 할머니가 병실에 들어올 때는 사망 직전의 환자였는데, 예상외로 현재 그들보다 회복이 훨씬 빠르니 매우 놀랐으며, 모두 불법을 배워 염불해야겠다고 말하였다. 이 사건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불법으로 인도하였으며, 외삼촌, 외숙모도 불법의 불가사의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외할머니는 퇴원 후 다시 채식하겠다고 말하니, 자식들도 이상의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그렇게 따르기로 하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지장경』을 염송한 자초지종을 듣고는 불보살이 자기를 구했다고 깊이 믿고 더욱 열심히 염불하였다.
이전에는 모든 가정 사정을 물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것도 관여하지 않았으며, 나에게 일심 염불하여 정토왕생의 자량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내가 매일 「대비주」를 염송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대비주」의 수승한

공덕을 듣고 「대비주」를 배우려고 하였다.
양 여사가 말하였다.
“「대비주」는 확실히 매우 수승합니다. 다만 노인네가 연로하시며 또 흔히 쓰지 않는 글자가 많으니 굳이 이것을 염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심으로 ‘아미타불’ 성호를 지송하면 됩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기왕 「대비주」가 불법을 배우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라면 반드시 배우겠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외할머니는 염불하는 시간 외에 특별히 시간을 내어 녹음테이프를 따라 반복하여 배웠다. 연세가 많아 기억력이 떨어져 자주 잊어 먹었다. 그러나 법을 배우겠다는 마음이 매우 견고하여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암송할 때까지 반복하여 나에게 듣게 하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는 글자는 수정하게 하였으며, 모든 글자를 정확하게 염송해야만 만족하였다. 이후 그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난 후 먼저 「대비주」 일곱 번을 염송한 뒤 하루 종일 “아미타불”을 염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일년 이상 지속하였다.

외할머니는 매년 병원에 가서 한 번씩 수혈을 받았다. 어느 날 외사촌형이 할머니를 모시고 수혈을 받고 있는 중 돌연 반대편 벽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누가 창문을 열었나! 어째 이렇게 큰 바람이 들어오냐?” 하고는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형은 급히 의사를 찾아 응급조치를 하였다. 조금 지나 깨어난 외할머니가 의사에게 하는 말이 “의사 양반! 내가 돌아왔어.”라고 하였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할머니는 완전하게 정신이 돌아오자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혼미해진 뒤 내가 매우 넓은 대로를 따라가는데 길 양 옆에 많은 사람이 서서 소라를 불고 북을 치고 하는 것이 마치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으나, 나에게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어. 내가 계속 대로를 따라 앞으로 가니 작은 절이 보였어. 그러나 절 안에는 불상도 없고 아무도 없었어. 나는 이곳은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인가 생각하고 돌아왔지. 돌아 걸어오니 깨어난 것이야.”

외할머니가 이야기를 마치자 병실의 환자들은 모두 놀랐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모든 일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치료하는 주치의가 말하였다.

“할머니, 당신이 간 그 곳은 아마 토지묘(土地廟)일 것이며, 그 곳은 당신이 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반드시 아미타불이 당신을 맞이하여 서방극락세계에 가야 하며, 다른 어떤 사람이 맞이하면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알고 보니 의사선생님도 불교인이었으며, 이것은 정말로 외할머니의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외할머니는 모두에게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이야기한 후 반드시 인과와 육도윤회를 깊이 믿고 조속히 불교에 귀의하고 불법을 수행하여 삼계를 벗어나 생사를 해탈할 것을 권하였다.

한 달 후 어느 날 오후 우리 집에 모셔둔 불상이 갑자기 탁자 위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매일 내가 불상을 깨끗하게 닦고 모셔놓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불상을 다시 새로 모셔놓으니 이때 외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내려왔어. 내가 빨리 가야겠다.”
나는 듣고 재빨리 말했다.
“할머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 사실 날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건 오늘 내가 다 닦지 않고 모셔놓아서 불상이 떨어진 것입니다. 할머니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말했다. “갈 때가 되었어.”
저녁에 어머니가 돌아오니 외할머니는 속이 안 좋아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 날 저녁 할머니는 토하기 시작하여 연 3일을 토하였다. 평소 나는 매일 저녁 잠자고부터 날이 샐 때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습관을 갖고 있는데 4일째 되는 날 새벽 4시경 나도 모르게 갑자기 일어나졌다. 할머니 방에서 무슨 동정이 있기에 건너갔다. 가서 보니 어머니, 누나 모두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할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누나보고 빨리 외사촌 오빠에게 연락하여 병원으로 후송할 준비를 시켰다.
이때 나는 재빨리 할머니 귀에 대고 말했다. “제발 아미타불 염불하시는 것을 잊지 마세요. 반드시 서방극락세계에 가십시오.”
두 분 사촌형님이 도착한 후 외할머니는 갑자기 깨어나시면서 말하기를 “너희들 어째서 모두 왔니?”
두 분 형님은 말했다. “좀 있다가 병원에 모시려고요.”
할머니는 말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어머니가 할머니더러 조급해 하지 마시고 가실 때 다시 입으시라고 하였으나 할머니는 그래도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셨다. 어머니가 물었다.
“배고프세요? 배고프면 우유를 마시세요.”
할머니는 우유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는 침대 밑에 정리해둔 옷을 다 입은 후 갑자기 머리가 돌아가시면서 몸도 아래로 내려앉았다. 두 형은 급히 할머니를 침대로 모셨다. 두 형은 병원에 가지 말자, 어디 가도 늦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울기 시작하자 두 형은 “울지 말아야 한다. 노인이 왕생하는 데 영향을 주니. 너희들은 옆방으로 가서 뒷일을 상의하고 우리들은 노인을 위하여 조념을 하겠다.”고 말했다.
나와 누나는 바닥에 꿇어앉아 큰 소리로 염불하고 아울러 할머니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하였다. 반드시 믿음을 굳게 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해야 한다고 하였다. 큰형과 형수는 나의 일 때문에 부처님을 믿고 불교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조념은 새벽 5시부터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눈을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염불을 아침 8시까지 하였을 때 눈을 감고 입도 닫았으며 매우 자상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이때 친척들이 다 와서 외사촌형이 장례를 상의하였다.
“할머니께서 기왕 부처님을 믿고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를 원하였으니, 큰아버지, 삼촌께 청하오니 저는 불교식으로 장례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의견은 어떻습니까?”
모두 일치하여 “단지 노인에게 유익하다면 무슨 방법이든 모두 좋다.”
사촌형은 다시 말하였다.
“모두가 할머니에게 매우 효성스러우니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다같이 도웁시다. 슬픔을 자제하시고 큰소리로 울지 마십시오. 염불을 원하시는 분은 우리와 같이 할머니 옆에서 염불하고, 그 밖의 사람은 장례 일을 상의하십시오. 8시간 후 할머니에게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힐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 빈소를 설치합시다.”
아침 9시경 나는 양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오셔서 조념의 일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얼마 후 양 여사는 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매우 좋습니다. 노부인은 이미 서방에 왕생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후 바로 내 눈앞에 노부인이 깨끗한 꽃 속에 단정히 앉아있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몇 사람이 꿇어앉아 염불하고 있었으며, 노부인은 염불소리 가운데서 서서히 서방으로 향하여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경계가 매우 상서롭고 장엄하였습니다. 노부인은 평생 선을 행하고 만년에 일심으로 염불하면서 왕생을 원했으며, 또 임종시 전가족이 조념하고 법대로 장례를 준비하였기 때문에 직접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였습니다.”
양 여사도 우리와 같이 계속 조념하였다. 그리고 몇 명의 사촌형, 누나는 비록 부처님을 믿지는 않지만 자기 할머니에 대해 이와 같이 많은 불가사의한 현상을 듣게 되고 아울러 우리 모두 꿇어앉아 성심으로 노인을 위하여 염불하는 것을 보면서 같이 꿇어앉아 염불하기 시작하였다.
유체를 화장한 후 나는 할머니에게 『아미타경』을 49일 동안 독송해드리겠다고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노인의 왕생품위가 올라가며 아울러 노인이 몸을 나타내 우리들에게 안심시켜 줄 것을 희망하였다. 큰형과 형수도 매일 노인을 위하여 독경하였다. 독경한 지 사흘 후 사촌형이 전화를 걸어 나에게 알려주었다.
아침에 형수가 일어난 후 정리하느라 매우 피곤하여서인지 눈을 뜨려고 해도 뜰 수가 없었다. 이 때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면서 노인이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몸에는 스님 옷을 입고 이미 머리를 깎은 모습이었다. 생전에는 키가 작고 야위었는데, 당시 키가 매우 높고 컸으며, 야위지도 않고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형수가 노인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노인은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단다. 형수는 본래 노인의 정상(頂上)에 스님의 계 받은 흔적을 보려고 했으나, 노인의 머리에는 금빛이 빛나면서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었으며, 나를 부르려고 했으나 입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으며, 상서로운 모습이 2, 3분간 지속되다가 서서히 소멸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뻤으며, 염불심이 깊으면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출처]오대산 노스님의 인과 이야기

 

 

      대구 염불선원에 주석 하셨던 수산 스님

법도 있는 불교 집안의 후손인 부친 안주원씨의 3남 중 차남으로 1906년 2월 20일에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부터 불교에 뜻을 두고 출가할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때는 이루지 못하고 한문 서예학습에 전념하면서 한의학을 배워 32년부터 한의원을 개업하였다.


51년에 드디어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 하였으며 54년도에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수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20하안거를 지내시며 수도에 전념 하였고 1973년에는 해인사에서 "정토염불은 불법중에 제일 중요한 법문" 인데 근래에 쇄퇴 해짐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부흥시킬 뜻을 세우시고 자운 스님과 함께 염불만일회를 결성하여 대중과 함께 염불당을 설립 하였다.


76년부터는 대구 남지장사와 경주 법장사, 기림사등 주지를 역임하시고 85년에 대구 염불선원을 건립하여 선원장으로 주석하시면서 염불만일회와 노인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셨는데 항상 법문하실 때는 당부하시기를 


부모에게는 효를 행하고, 스승과 어른에게는 공경으로 대하며, 살생과 도둑질을 하지 말라, 하시고 그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왕생업을 닦게 하셨는데 그중에 많은 이들이 금생에 바로 염불공덕을 입어서 수많은 영험담을 남겼으며 스님께 법을 듣고 출가한 신도 또한 여러명 있었다.

또 전국을 다니시면서 순회설법을 하셨는데 그때 스스로 "불청우"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청하지 않아도 벗이 되어 염불법을 알게 하여 사바를 벗어나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법문을 다니실 때는 정토법문집등 저서를 무상으로 보시 하셨는데 그 수가 30만권에 이르며, 또 재소자들 포교를 위하여 4만권의 책자를 전국 교도소에 배포 하였다.


또 스님은 수많은 경전속에서 정토와 염불에 관한 경문을 찾아 내셨는데 (연화세계 책 속에 수록) 그래서 항상 경전의 3분의 1은 정토부 경전이라고 힘있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평생을 生持戒律 즉 살아서는 계율을 지키고 死生淨土 즉 죽어서는 정토에 태어나자.를 주창하시면서 광제중생을 펴시다가 세연이 다하여 입적하신 때는 1996년 10월 1일 오전 6시 염불선원의 광명당 이였는데 입적하실 때까지 거의 7일간을 신도와 스님들은 번갈아 가면서 계속 끊어지지 않고 조념을 하여 왕생을 도왔는데 때를 당하여서는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나고 스님께 서로 두 팔을 올려 합장하는 상을 지으시면서 눈에는 잠시 광채가 있었다고 지켜 본 이가 전하였다. 


큰스님은 그렇게 불 보살님의 영접을 받아 향기를 뿌리며 그리운 극락세계에 왕생하신 것입니다


저서 : "정토지남" '시심작불, '정법수호론, '수행요집,

'염불법문집, '연화세계.

번역서 : 아미타경, 염불요문, 만선동귀집,

음반 : 권왕가, 극락으로 가는길, 정토 성불의 길.

 

 

성월스님의 극락왕생과 안양암 신도들의 극락왕생 사례
글쓴이 : 금강반야사
서울 창신동의 안양암을 세운 분은 성월대사이신데 출가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염불해야 극락간다라는 말을 듣고는 유명한 스님을 찾아가서 생사를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그러나 니같은 놈이 무슨 공부냐며 몇번이나 쫓아냈는데도 오고 해서 그러면 나무아미타불을 하라 하였습니다.그래서 출가한 뒤 안양암을 창건하고 염불만일회를 결성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염불하셨습니다.말년에 성월스님이 7일전부터 극락왕생한다고 예언을 했는데 몸이 미진해서 이씨 안양행 보살이라는 분이 시봉을 하였습니다.그런데 보살님이 낮에 깜빡 졸았는데 갓을 쓴 노인 한 분과 동자한 분이 스님 방으로 들어갔는 것을 보고는 깨어나서 스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그랬더니 스님이 가사장삼을 수하시고는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보살님이 "스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의 지금 지장보살님과 문수동자님이 오셔서 예를 올리는 거라 하셨습니다.그리고 며칠 뒤에 앉아서 염불하시고 극락왕생하셨습니다.다비를 하니 사리가 나왔고 49재 때 때때로 방광을 하였다 합니다.

성월스님의 신도 가운데에서도 염불수행하며 극락정토한 사례가 많습니다. 한 처사는 극락왕생 발원하고 염불하면서 지장경을 독송하였는데 돌아가실 때 앉아서 자손들에게 저기 연꽃이 왔다.내가 어찌 걸아서 가겠는냐.나는 저 연꽃을 타고 극락왕생한다. 내 죽거든 염불하거나 재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또 한 처사는 나무아미타불염불을 한 분인데 돌아가실 적에 자손들을 모아놓고 지금 관세음보살님이 너의 엄마(일찍 돌아가신 모양입니다.)로 변해서 오시는구나.내가 관세음보살님을 따라 극락왕생한다하고는 염불하며 임종했습니다.또 한 처사 왕생할 적에 자손들을 모아놓고 문수동자보살께서 오시는구나.나는 저 보살님을 따라서 오대산 문수보살 계신 곳에 참배하고 극락세계 간다하고는 염불하고 돌아가셨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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